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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증과 영수증에 얽힌 얘기

우적성(雨滴聲) 2023. 3. 16. 02:14

 

 

198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처가에 갔다가 우연히 장인어른과 처외삼촌의 돈 꿔주는 현장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게 되었다.

매형인 장인어른께서 돈을 빌려주시고

처남 되시는 처외삼촌께서 그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사전에 얘기는 이미 다 되어있었고 마무리만 하면 되는 현장이었다.

 

두 분께서 마주 앉으신 후 처외삼촌께서 차용증을 써서 건네셨고

장인어른께서 그 차용증을 받으신 후 돈뭉치를 건네셨다.

보기 좋았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잘 알기에,

그리고 궁지에 몰린 사람은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차용증을 주고받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물론 살다 보면 돈을 꿔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의 내 기준은 '돌려받지 못해도 될 만큼만'이다.

즉 그 돈을 떼인다 해도 뭐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될 정도만 꿔준다는 뜻이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 기준을 적용해 왔다.

상대방이 사정이 생겨 약속보다 조금 더 늦게 돌려주게 될 것이라고 말해도 큰 불만은 없었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늦게라도 돌려준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언제나처럼 '돌려받지 못해도 될 만큼만'이라는 기준을 적용했기에

가슴에 담아둔 경우는 없다.

처음부터 '돌려받지 못해도 된다'라고 생각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얘기 하나.

 

차용증을 써주고 돈을 빌렸다.

나중에 그 돈을 갚을 때 법률관계 해소를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기왕에 써주었던 차용증을 상대방으로부터 돌려받는다

     2) 돈을 갚았다는 영수증을 상대방으로부터 받는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을까?

 

보다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고 또 원인증서를 없애 버리는 방법인 1)이 좋아 보이지만

나는 2)를 권유하고 싶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자.

 

1)의 방법으로 차용증을 돌려받았더라도

상대방이 차용증 사본(copy)을 제시하면서 변제를 요구할 수 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 한 경우도 많다.

 

상대방이 '차용증 원본은 분실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사본은 남아있다'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라도 한다면,

'빌린 돈은 이미 갚았고 차용증 원본은 돌려받아 폐기하였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거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니 2)처럼 영수증을 받아놓는 게 더 좋다.

즉 돈 빌릴 때는 '차용증' 써주고,

돈 갚을 때는 '영수증' 받고 하는 것처럼

법률행위 하나 할 때마다 서류 하나씩 만드는 게 좋다.

각각의 법률행위에

각각의 서류를

각자가 챙기는 게 좋다는 얘기다.

 
아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사느냐고?
난 그런 게 복잡하지 않다.
이게 복잡하다고 생각되면 그 녘은 그 녘 마음대로 해도 된다.
세상에는 꼭 수업료를 치러 봐야 뭘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처럼 수업료 치를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조심조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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