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갑과 을', '갑을 관계', '갑질'에서
'갑'과 '을'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부분은 같은 결과가 나왔다.
'갑'은 ‘센 사람,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 횡포를 부리는 측’으로 생각하고,
'을'은 그 반대편에 선 ‘약한 사람, 저열한 지위를 가진 자, 횡포를 당하는 측’ 정도로 생각한다.
현실적인 인식이다.
'센 사람,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 횡포를 부리는 측'을
'왜 '갑'이라고 표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센 사람,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 횡포를 부리는 측'을
'을'이 아닌 '갑'이라고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갑'과 '을'이 그렇게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갑'과 '을'은 법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요사이에는 어떤 사안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등장할 때
이름을 적지 않는다면 영어의 'ABC'를 쓴다.
'A와 B가 C를 만나러 가는데' 하는 식이다.
서양문물에 익숙해진 지금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전에는 사람에 따라서는 '홍길동'을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말이야, 홍길동이 임꺽정과 계약을 맺었는데...'
영어의 'ABC' 대신에 우리의 '가나다'를 쓸 수도 있으련만 요새 누가 그런 표현을 쓰겠는가...
법에서는 한자 표현인 '갑을병정'을 썼다.
'갑을병정'으로 시작하는 것과
'자축인묘'로 시작하는 것을 조합한 것이
육십갑자가 아니던가.
1970년대 법학과의 형법과목이라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이런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고는 했다.
'갑이 을과 모의하여 병을 살해하려 자동차로 치고 달아났으나 병은 사망하지 않았다.
이때 그 뒤를 따르던 정이 쓰러진 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2차로 자동차로 치어 병을 사망케 하였다.
이때 갑, 을, 정의 죄책은 무엇인가.'
이렇듯 법에서는 '갑을병정'이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갑을 관계', '갑질'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야겠다.
계약을 할 때 당사자를 정확히 표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당사자 표시가 있다면 이를 간략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갑'과 '을'이다.
삼형전자주식회사가 홍길동통신판매상사에게
스마트폰 우주 천하 500대를 판매하는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해보자.
계약서 초반 부분은 이렇게 작성될 것이다.
제1조 이 계약은 삼형전자주식회사와 홍길동통신판매상사 사이의 스마트폰 우주 천하 거래에 관한 약정이다.
제2조 삼형전자주식회사는 홍길동통신판매상사에게 스마트폰 우주 천하 500대를 공급한다.
제3조 홍길동통신판매상사는 삼형전자주식회사에게 금 3,000만 원을 지급한다.
(이하 생략)
이런 약정에서 계약 당사자인 ‘삼형전자주식회사’와 ‘홍길동통신판매상사’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간편하게 정리하는 것이 '갑'과 '을'이다.
위 계약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제1조 이 계약은 삼형전자주식회사(이하 '갑'이라 한다)와 홍길동통신판매상사(이하 '을'이라 한다) 간의 스마트폰 우주 천하 거래에 관한 약정이다.
제2조 갑은 을에게 스마트폰 우주 천하 500대를 공급한다.
제3조 을은 갑에게 금 3,000만 원을 지급한다.
(이하 생략)
어떤가.
제2조부터는 훨씬 간단해지지 않았는가.
당사자의 이름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
그것이 '갑'과 '을'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런 계약이 다수의 다른 당사자와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삼형전자주식회사는
당사자의 표시인 '홍길동통신판매상사'에 해당하는 부분과
'거래 내역'에 관한 부분을 공란으로 하여
후일 다른 계약 당사자를 위해 그때마다 필요한 부분을 적어 넣을 수 있는 계약서를 인쇄해서 준비한다.
이런 계약서를 '약관'이라 한다.
보험, 자동차 구입, 은행 등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제1조 이 계약은 삼형전자주식회사(이하 '갑'이라 한다)와 (이하 '을'이라 한다) 간의 스마트폰 우주 천하 거래에 관한 약정이다.
제2조 갑은 을에게 스마트폰 우주 천하 대를 판매한다.
제3조 을은 갑에게 금 원을 지급한다.
(이하 생략)
이때 '갑'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의 약관을 인쇄해서 '을'에게 제시한다.
결국 '이 계약서에 의해 계약을 하시든가, 아니면 마시든가'의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을'이 자신의 불리함을 제거하기 위해 계약 내용의 변경을 가하려고 하면
'갑'은 계약 맺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갑'이 제시한 조건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갑'이 우월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 '갑을 관계'이고,
이때 '갑'이 부리는 횡포가 '갑질'이 되는 것이다.
문득 걱정이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이렇게 길게 말하고 있는 거나 아닌지...
그래도 최종적으로 한 마디 더.
'갑'과 '을'은 법에서 나온 말이다.
정석, 꼼수, 무리수, 악수, 장고 끝에 악수, 자충수, 미생, 완생 등은 바둑에서 나온 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