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적용 기계가 아니고
당사자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그 판사라는 사람은
‘사건에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면 되는 사람인 것일까?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가 하지 않는 일에 관해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법도 그렇다.
퍽도 간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잊지 마시라.
뭐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복잡다단한 것이 들어있다.
내가 하는 일 빼고 난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 같은 일이라는 그런 태도를 갖지는 말자.
얘기 하나.
빵 하나에 1,000원 하던 시절에 100,000원을 빌려주었다.
빌려준 돈이면 빵 100개를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후 전쟁이 났고 이어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전쟁 전에는 빵 하나 사려면 1,000원을 지불하면 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빵 하나를 사기 위해서 20,000원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빌린 사람,
100,000원을 들고 갚으러 갔다.
왜냐하면 빌린 돈이 100,000원이었으니까.
돈을 빌려준 사람,
기가 찰 노릇이다.
전쟁 전에는 빵 100개를 살 가치의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제는 겨우 빵 5개를 살 수 있는 가치의 돈을 들고 왔다.
그래서 100,000원을 갚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빵 100개를 살 수 있는 돈을 빌려주었으니까
갚을 때에도 빵 100개를 살 수 있도록
2,000,000원을 갚으라고 했다.
돈을 빌려간 사람,
아니 그게 무슨 얘기냐고,
내가 빌린 것은 100,000원이었으니까 100,000원을 갚으면 되는 것이지
왜 2,000,000원을 갚아야 하느냐고 주장.
빌린 돈 갚으러 왔는데
빵값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역정.
원만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 두 사람은 법원의 판단을 받기로 했다.
자,
그대가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라면 어찌하실까?
정의에 입각해서 2,000,000원을 갚으라고 판결하시려나?
이 사건 하나야 그렇다고 하지만
이 사건 판결을 보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많은 유사 사건은 어쩌시려나?
돈을 꿔준 것뿐만 아니라 물품대금 청구소송도 엄청 많이 제기될 텐데,
이때에 위협받게 될 법적 안정성을 어쩌고?
하…
정의와 법적 안정성,
무엇을 택해야 하나?...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법원은 침묵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야 한다.
‘하… 이거 참 난감하니까 둘이서 적당히 알아서 하세요…’할 수가 없다.
당사자 사이에서 얘기가 잘 안되었기에 법정으로 사건을 가져온 게 아니던가.
빌린 돈 액수인 100,000원을 갚으라고 하든지,
현재 가치인 2,000,000원을 갚으라고 하든지,
아니면 따로 법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금액을 결정해주든지 해야 한다.
이 사건은 법 조항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그 법 조항을 해석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이것은 '법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의 문제이다.
그러니 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법 적용의 기계'로만 생각하지 마시길.
그들 역시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바람직한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앞에 든 예는 꾸며낸 얘기가 아니고
오래전 독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조금 고쳐본 것이다.
법학과 교과서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