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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학교에서 뭘 배웠어?법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 2023. 3. 16. 03:05
"김대리, 물권법이 어디 있지?
도저히 못 찾겠다 야."
직장 선배가 두툼한 법전을 내게 내밀면서 한 말이다.
그때 '아... 내가 강자(强者)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1980년대 중반 회사에 들어간 후 배치된 곳은
판매한 상품의 대금 회수를 위해 제반 법적 조치를 하는 부서였는데
‘채권관리부(債權管理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부서는 대략 세 부류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대학 법학과 출신
- 변호사/법무사 사무실 출신의 경력자
- 학교에서 공부해본 적 없고 관련 업계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고 회사에 들어와서 이 일을 배운 사람들
부서 배치 후 선배들로부터 실무교육을 받는데 교육 첫날에 내가 받은 첫 질문 이것이었다.
"임의경매와 강제경매의 차이가 뭐야?"
읏.
경매에 그런 게 있었던가?
처음 듣는 얘기인데?
"모르겠는데요..."
"아니, 법을 6년씩이나 배운 사람이 그것도 몰라?"
슬쩍 비꼬는 말투.
"그런 거 안 배웠습니다."
"그럼 학교에서 뭘 배웠어?"
이젠 대놓고 무시까지.
이런 제기랄...
임의경매나 강제경매, 뭐 이런 건 학교에서 안 배운다고요...
교육을 마치고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같은 '절차법'보다는
헌법, 민법, 형법, 상법 같은 '실체법' 공부에 치중한다.
그런데 상품대금 회수를 위한 회사 업무는
대부분 '절차법'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익숙지 않았고 쉽지도 않았다.
교과 과정에 민사소송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 뭘 배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일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도움이 되더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나도 모르게 체득한 법적 사고방식(Legal Mind)과
법전 또는 법률서적에서 관련 내용을 빨리 찾아내는 것이 회사 업무를 배우는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만나는 가압류, 본압류, 공탁 같은 절차들을
같이 입사한 동료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내게 '임의경매와 강제경매의 차이'를 묻던 하늘 같았던 선배가
'물권법이 법전 어디쯤에 있는지' 내게 질문한 것이다.
법령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서 각각 나오지만 그것들을 모아놓는 법전은 정부기관에서 만들지 않는다.
그 많은 법령을 책 한 권에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각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법령을 취사선택하여 법전을 만든다.
모든 법전은 헌법을 맨 앞에 배치한 후 법전을 출판하는 회사가 정한 기준에 따라 법령을 배치한다.
그리고 어느 법전이든 거기 수록된 법령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한 목록을 만들어 두어서
빠르고 쉽게 법령을 찾을 수 있게 한다.
변호사 사무실 출신이었던 그 선배는 그 날 '물권법'에서 확인해야 할 조항이 있는데
법전의 가나다순 목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물권법'이 안 보여서 내게 말을 건 것이다.
당연하다.
법전의 가나다순 목록에는 '물권법'이 없다.
실무상 '물권법'이라는 표현을 쓰고 '물권법'이라는 이름의 교과서도 있다.
그러나 법전의 가나다순 목록에는 '물권법'이 없다.
여기서 '물권법'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권법'이라는 별도의 법률은 없다.
'민법'이라는 법률이 있는데 이 ‘민법 제2편’의 제목이 '물권'이다.
즉 ‘민법 제2편’이 물권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어서
이 부분을 떼어내어 얘기할 때 통상 '물권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과서 제목도 '물권법'이고 대학의 교과과정에서도 '물권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시 얘기하거니와, '물권법'이라는 별도의 법률은 없다.
‘민법의 제2편’ 제목이 '물권'이고 이를 '물권법'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물권에 관한 규정은
‘물권법'이라는 별도의 법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민법 제2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선배의 그 질문을 받으면서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배운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실무에서 시작한 그 선배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법전의 '민법' 제2편을 펴서 건네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더 이상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담당 업무 범위를 독자적으로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선배들이 내게 물어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 정도 경력에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느냐'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배운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즐거움을 누렸을 뿐이다.
그리고 배운 것과 알게 된 것을 기쁘게 나누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부서에 배치된 신입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직접 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임의 경매와 강제 경매의 차이’를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선배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하고 타박을 준 이유가
기습 선제공격을 통한 법학 전공 신입사원에 대한 견제와 기강 잡기 시도였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그것도 아주 나중에,
추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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