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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서류가 말한다법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 2023. 3. 8. 21:30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라는 것을 제출한다.
그 증거에는 증인의 진술, 각종 서류, 현장검증 따위가 있다.
민사소송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수행하는 경우에
그 당사자는 분통이 터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법관이 도대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나의 말을 믿지 않다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게다가 법관은 뻑하면
"뭐 입증할 만한 서류가 있습니까?"
하는 말로 당사자의 화를 돋운다.
아니, 그깟 서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리고 사람이 뭘 할 때마다 매번 서류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법정에서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서류'가 말을 한다.
당사자가 말로 약속을 하는 구두계약도 계약임에 틀림없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 계약의 전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합의된 내용을 서면으로 적어둔다.
왜?
사람의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니까.
게다가 사람은 거짓말을 하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합의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 계약'서'를 만드는 이유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계약에 관한 다툼이 생기면
법관은 계약서를 가지고 일단 판단한다.
즉 당사자가 무슨 합의를 했다가 다툼이 생겨
그 다툼을 법정으로 가져가면
법관의 판단은 계약'서'에서 출발한다.
‘계약서’란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을 '서류화'한 것이니까.
법정에서 재판이 벌어졌다는 것은
계약 내용에 관한 당사자의 주장이
이미 극명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법관은 그들의 주장으로 만으로는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가려낼 수 없다.
법관은 증거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는 ‘계약서’라는 '서류로 된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다.
소송에서 당사자가 맨 처음 제출하는 증거가 '서류'이고
또 증거의 대부분이 '서류'이다.
법관이 당사자의 주장이나 진술보다 서류를 더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계약을 구두로만 하지 않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유와 같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지만 서류는 기억이 흐려지는 법이 없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본적 있다.
그 가증스러움이란......
당사자와 조금 떨어져서 객관적 입장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법관은
언제라도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보다는
조용히 진실을 보여주는 '서류'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한다.
법정에서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류가 말을 한다.
그러니까 후일을 생각한다면 서류를 꼼꼼히 잘 작성하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함부로 서명하거나 도장 찍을 일이 아닌 것이다.
계약서나 약정서를 대강대강 작성하고 설렁설렁 살펴보는 경우를 지켜보면 조마조마하다.
폭탄을 가슴에 안은 채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에 그런 글이 있다.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에게 꼬마가 묻는다.
잠을 잘 때에는
그 수염을 이불 위로 내놓고 자는지
그 수염을 이불 밑에 넣고 자는지.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내일 대답해 주겠노라고 말한다.
밤이 되어 자리에 누운 할아버지는
수염을 이불 위로 내놓아보았다.
허전하다.
이번에는 수염을 이불 밑으로 안으로 넣어보았다.
답답하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력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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