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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만만하지 않다법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 2023. 3. 16. 01:49
돈 천만 원이 필요한 성춘향은 알고 지내던 홍길동에게 융통을 부탁했다.
커피숍에서 만난 홍길동은 '형식적이지만...'이라면서 차용증을 써 달라고 했다.
당연한 일이므로 성춘향은 차용증을 써주었다.
차용증을 챙긴 홍길동은 돈을 가져오겠다며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도 홍길동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춘향은 '별 미친...'이라는 생각을 하며 커피숍을 나섰다.
홍길동에게 써준 차용증이 걸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뭐 돈을 받은 게 아니니까...'
하면서 무시했다.
몇 달 후 성춘향에게 법원에서 보낸 서류가 날아왔다.
꿔간 돈 천만 원을 갚으라고 홍길동이 소송을 낸 것이다.
세상에 세상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정해진 날 법정에 출석했더니
홍길동이 꿔준 돈을 돌려받지 못해서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원고석에 서있었다.
성춘향은 홍길동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피고석에 섰다.
판사가 혼자 중얼거린다.
"원고, 소장 진술하고..."
그러고는 성춘향을 쳐다보며 묻는다.
"피고,
돈 천만 원 꿔주고 돌려받지 못했다는데,
그런 적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사실은요"
성춘향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하려 하자
판사는 자기 앞에 놓인 소송서류를 들여다보면서
성춘향의 말을 가로막듯이 중얼거린다.
"피고, 청구취지 부인."
판사는 홍길동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원고, 여기 첨부된 차용증을 증거로 제출하시겠습니까?"
"예."
"갑 1호증으로 차용증 제출하고."
판사가 성춘향을 바라보며 묻는다.
"성립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
인정할 수 없지.
돈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차용증을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지.
아무렴!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판사님."
판사가 뜨악한 표정으로 묻는다.
"피고, 인정할 수 없다고요?"
"예,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판사님."
"이 차용증, 본인이 쓴 것 맞나요?"
"예, 맞습니다."
"이 차용증에 있는 도장, 피고 도장이 맞나요?"
"예, 제 도장 맞습니다."
"자신이 쓰고 자신의 도장이 찍혀 있는데 성립 인정을 할 수 없다고요..."
"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때 판사는 몹시 곤란하다.
민사소송은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과 증거 제출을 소송 당사자가 제출해야 한다.
판사가 도와줄 수 없다.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판사가 어느 한 편을 도와준다는 것은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그러니 당사자에게 ‘성립 인정’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가며 소송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법정으로 돌아간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판사는 결심한 듯 나지막이 말을 이어간다.
"성립 인정, 입증 취지 부인."
피고 성춘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판사는 성립 ‘인정’이라고 말한다.
판사가 혼잣말처럼 한 이 말은
법정에서 변론이 열릴 때마다 법원 직원이 작성하는 서류인 변론조서에 기재된다.
이런 일은 변호사 선임 없이 당사자가 직접 수행하는 민사소송의 첫 번째 변론기일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 사건에서 차용증이 증거로 제출되었을 때 판사가 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자.
"성립 인정하시겠습니까?"
여기서 판사가 물어보는 것은
그 차용증이 '성춘향의 의사에 기해 작성'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떤 서류가 그 서류의 작성자에 의해 작성되었을 때 '성립 인정' 또는 '진정성립 인정'이 되는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거나 성춘향이 그 차용증을 쓴 게 사실이므로
성춘향은 '성립 인정' 또는 '진정성립 인정'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차용증이 성춘향이 써준 것이 아니고
홍길동이가 자기 마음대로 만든 것이라면
당연히 성춘향은 진정성립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증거로 제출된 서류에 대해 상대방이 진정성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증거를 제출한 쪽에서 입증하여야 한다.
즉 성춘향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차용증이라면 성춘향은 진정 성립을 부인하게 된다.
이때에는 그 차용증을 제출한 홍길동이
'그 차용증은 성춘향이 작성한 것'이라는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다.
제출된 증거 서류가 '그 서류를 작성한 사람의 의사에 기해 작성'되었을 때
'형식적 증거력'을 갖게 되고,
이 '형식적 증거력'을 가져야만
다음 단계인 '실질적 증거력'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판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인 '성립 인정, 입증 취지 부인'은 무슨 뜻일까?
성립 인정,
이 차용증은 피고 성춘향이 작성했다는 뜻이다.
입증 취지 부인,
피고 성춘향은
원고 홍길동이 이 차용증으로 증명하려는 내용
즉 돈 천만 원을 꿔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고 홍길동이 이 차용증을 제출한 것은
자신에게 돈 천만 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 차용증이 천만 원을 갚아야 할 의무의 근거가 될 수 없다'라고
피고 성춘향이 주장한다는 뜻이다.
성춘향이 아예 돈을 꾼 적이 없었는지,
아니면 돈을 꾸기는 했지만 이미 갚았는지
판사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이 차용증이 돈 천만 원을 청구하는 '입증'서류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접수했다.
물론 판사는 피고 성춘향이 돈을 꾸고서 갚지 않았을 가능성도 항상 열어 둔다.
말이 길었다.
법과 관련되는 일은 한글을 깨쳤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 중에는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다.
형식적 증거력, 실질적 증거력까지 갈 것도 없다.
"성립 인정, 입증 취지 부인."이라는 판사의 짧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판사가 불친절하다느니,
판사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상대방 변호사 말만 듣는다느니 하는 불평을 늘어놓지는 말자.
법,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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